낙조(落照)를 바라보며

김정렬(본지논설위원/시민감사관)

    평생을 직장생활만 하다가 퇴직을 하고나니 가끔은 무기력증에 빠지기도 한다. 특히, 살아오면서 별로 해놓은 것도 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면 내가 찾는 곳이 있다. 을왕리해수욕장이다. 인천대교를 건너 해안도로를 승용차로 30여분 지나면 나오는 곳이다.
    해수욕장에 도착해서 아름다운 백사장에 앉아 해질녘의 낙조를 바라본다. 태양이 형형색색의 빛살을 쏟으며 아름다움을 발하다가 ‘낙조대 카페’의 세모진 건물에 걸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안타깝게 보인다. 하지만, 그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무아경(無我境)에 빠지게 한다. 비단결같이 고운 해변의 모래밭과 기암, 그리고 소나무 사이로  곱디고운 햇살을 비추며,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낙조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떠오르는 태양이 아름다운 것은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지는 태양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 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낮 동안 세상을 한 바퀴 돌아 온몸을 불태우며 밝게 비추어 가며 만물의 성장을 재촉 하더니, 마지막 남은 정열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승화하며 낙조대 뒤로 서서히 빨려든다. 붉은 노을이 조명으로 남아 해수욕장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을 위한 낭만과 사랑의 무대가 된다. 
   영국의 대표적 유미주의(唯美主義) 시인인 John Keats (1795-1821) 는 오래된 그리스 항아리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그리스 항아리에 대한 송가(An Ode on a Grecian Urn)」라는 시를 썼다. 이 시에서 그는 "누구든지 나이 들어 한 세대를 마감할 때는 당신은 남아서 이렇게 말하리라. 아름다움은 진리요 , 진리는 아름다운 것이다.(Truth is beauty, beauty is truth) 이것이 너희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아는 것의 전부이고 알아야할 것은 이뿐이다. “고 우리 인생의 낙조를 예찬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 사랑하고 살다가도 나이 먹고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나면 시야에서 사라지고 잊힐 것 이라는 조바심 속에서 살고 있다. 또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냥 교만스럽게 행동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리스 항아리의 그림처럼, 세월이 가도 삶의 발자취는 영원히 존재하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쉰다. 이는 평생을 선교와 의료봉사하시다 생을 마감하신 이태석 신부, 장기려 박사, 공연수익금을 이웃을 위하여 쓰고 있는 유명 연예인,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기업인들, 부하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잠들어 계시는 채명신 장군,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 정신 등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비록 세상을 떠나지만 후세들에게 낙조가 되어 아름다운 빛을 선사하고 있다. 기나긴 낮 동안 태양이 열심히 온 세상을 밝게 만들고 만물을 키웠기에 낙조가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의 인생살이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열심히 살기에 노년이 아름다운 것 아니겠는가.
    올 한해는 대책 없는 질병으로 우리 모두의 삶이 힘들고 고달프기만 하다. 특히 ,노년에 질병으로 인한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고 계시는 어르신들,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소상공인들, 그리고 외로움으로 고통 받는 소외계층들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부디  다가오는 신축년(辛丑年)에는 이런 어려움은 다 사라지고 풍요와 희망, 그리고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원하며, 시 한편으로 새해인사를 대신한다.

    새 옷 입고 /아니, 헌옷이라도 빨아 입고 /널뛰듯 /널뛰듯
    이쪽과 저쪽 /오늘과 내일의 리듬사이를/
    발 굴러라 발 굴러라 / 춤추어라 춤추어라
    (김현승의「새해인사」에서)